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 > 이천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이천

    

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천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5-08-18 09:26

본문

죄와 예수가 주신 자유


1. 죄란 무엇인가 –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한 인간


죄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죄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현실이며, 인간 존재의 깊은 심연에 뿌리내린 신에 대한 반역이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어긴 ‘행위’ 이전에,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이며, 모든 악한 생각의 근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외형적 성장과 대중적 인기에 몰두한 나머지, 이 본질적인 죄의 실체를 감추려 한다. 현대 신학은 애매모호한 단어로 '무해한 죄론'을 설파하며, 의도적으로 죄의 뿌리를 흐릿하게 만든다. 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하나님과 원수된 이유가 실종되고, 예수의 오신 목적이 길을 잃으며 구원의 길이 암흑으로 바뀌게 된다. 로마서 5:10을 읽고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할 필요가 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개역개정)

히브리어 성경은 죄를 세 가지 언어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먼저 פֶּשַׁע(페샤)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반역을 뜻한다.  עָוֹן(아온)은 도덕적 왜곡, 곧 성품의 타락에서 비롯된 의도된 죄를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חַטָּאת(하타트)는 과녁을 빗나감, 곧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죄의 핵심인 반역(פֶּשַׁע)'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비교적 중립적으로 들리는 ‘도덕적 실수(עָוֹן)’나 ‘인간적 약점(חַטָּאת)’만을 강조한다. 이는 죄의 실체를 안개 속에 숨기려는 신학적 범죄이며, 진리를 왜곡하려는 사탄의 전략이다. 아직 사탄이 이기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주일 예배에 빠지는 것’을 곧 ‘하나님을 떠난 행위’로 규정하고, 정작 죄의 뿌리인 자기 중심성과 하나님의 주권 거부는 가르치지 않는다. 도둑질, 살인, 거짓말 같은 행위만을 죄로 여기고, 이를 회개하면 곧바로 용서받는다고 말한다. 고작 인간의 자질구레한 범죄를 용서하려고 예수가 고귀한 피를 흘렸다고 생각하는가? 이렇게 왜곡된 가르침은 결국 하나님을 찾는 갈급한 영혼들을 찬송가와 설교의 이름으로 지옥으로 인도하는 슬픈 결과로 귀결된다. 예수께서는 이미 이를 꿰뚫어보셨기에,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지 아니하셨던가? 마태복음 23:13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개역개정)


2. 죄의 시작

  • 죄는 단순한 ‘규범 위반’이 아닌 ‘관계의 파괴’

  •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

죄를 바로 보려면, 성경이 죄의 출발을 서술해 놓은 창세기 3장을 영의 눈으로 정독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 3장, 그것은 에덴동산에서의 단순한 ‘금단의 열매’ 이야기가 아니다.  그 핵심은, 인간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 한 선택”,  곧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려는 선언이었다. 그래서 죄는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영적 반역이며 자율의 우상화다.

하와는 뱀의 유혹 앞에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열매를 보았다. 이 구절에서 죄의 출발점이 드러난다 —바로 ‘탐욕’ 곧 욕심이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보며, “갖고 싶다”, “높아지고 싶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마음에 일어났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마음, 그 틈을 사탄이 노린 것이고 그 전략은 성공하고 말았다. 따라서 사탄이 이겼다.

탐욕은 곧 자기중심성을 낳는다. “내게 좋은 것”, “내게 유리한 것”, “내가 옳다”는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 순간,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고, 자신 안에 갇힌 존재가 되었다. 자아의 틀 안에 고립된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 유익’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소비한다. 하나님의 판단의 기준은 공의(公義 체데크 / 모든 창조물의 공존을 추구하신다)인데 반해 인간의 판단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다.

죄의 열매는 곧 이기심이다.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뒤 서로를 탓했고, 가인은 동생을 시기하다 결국 살인을 저질렀다. 죄는 이기심의 씨앗이자 열매이며, 그것은 점차 증오로 자라난다. 하지만 그 증오의 뿌리는 타인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아니라, ‘내가 상처받았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자기중심주의’다.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이 나를 해롭게 했기 때문에 그를 미워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행위를 내 자존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분노한다. 결국 미움은 언제나 ‘나’로부터 시작된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한 자니라.” (마 5:22, 요일 3:15)

이 말씀은 죄가 단지 행위가 아니라, 내면의 상태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미움은 탐욕에서 태어나고, 이기심을 타고 자라며, 결국 관계를 파괴하는 죽음의 열매로 맺어진다. 죄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망이며, 관계를 깨뜨리는 힘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리고 나 자신과의 내면적 조화까지 모두 파괴된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품으로가 아니라, 자기의 모양대로 살아간다. 그 순간부터 두려움이 시작되었고, 수치심이 생겼고, 비교와 경쟁, 시기와 폭력이 나타났다. 죄는 이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이다. 우리는 종종 죄를 “거짓말을 했다”, “남을 미워했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말하지만, 그것은 죄의 ‘열매’일 뿐이다. 진짜 죄는 하나님을 떠난 존재 상태, 곧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려는 의지”이고,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근원적 성향”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일지라도, 삶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면, 그는 여전히 죄 아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반복하여 말한다. “판단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나. 판단과 정죄는 우리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권한이다.


3. 탐욕의 시작 – 선악과와 생명나무

많은 불신자나 초신자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 가장 처음 마주하게 되는 의문 중 하나는 바로 ‘선악과 사건’이다.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왜 굳이 선악과를 만들어 인간을 죄에 빠지게 하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지금까지 시원하게 설명해 주는 책이나 설교를 대한 적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바로 ‘죄’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것에 대한 구속(救贖)에 있다. 죄의 정체와 무게를 깨닫지 못한다면 구원이라는 개념도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오늘 우리는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죄(Sin)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으면 예수 믿는 신앙은 무효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곧, 죄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 창세기 3장으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의 낙원에 사탄이 뱀의 모습으로 침투해 아담의 아내 하와에게 다정한 말투로 다가온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1)

이에 하와는 이렇게 대답한다.

“동산 나무의 열매는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2~3)

그러자 뱀은 더욱 매혹적인 말로 유혹한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4~5)

이 장면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지점이 있다. 바로 이것이다: "선악을 아는 것이 과연 나쁜 일인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분명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다. 문제는 그 기준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그 판단의 기준을 누가 정하느냐가 본질이다.

예를 들어보자. 배고픈 호랑이가 토끼를 만났다. 호랑이 입장에서는 축복이고, 토끼 입장에서는 재앙이다. 현실은 호랑이에게는 ‘선’이고, 토끼에게는 ‘악’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두 동물을 창조하실 때, 먹고 먹히는 생태적 질서를 두었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섭리다. 그래서 토끼의 개체 수는 호랑이보다 훨씬 많게 하였을 것이다. 이 질서 안에서 토끼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일은 ‘자연의 법’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다.

하지만 그 ‘토끼의 자리에 나 자신’을 놓아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가 손해를 입고 고통을 겪는 순간, 우리는 그 일을 ‘악’이라 판단하게 된다. 반대로 내게 유익이 되면 ‘선’이라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나의 유익과 손해에 따라 선과 악을 판단하는 태도, 바로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 즉 선과 악을 결정하는 권위를 스스로 탈취한 것이며, 그 결과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낙원에서 추방당하게 된 것이다.

에덴에는 단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곁에는 ‘생명나무’도 있었다. 선악과는 탐욕의 열매이며, 이기심의 열매이고, 자기 기준을 절대화한 열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리에 스스로 올라가고자 하는, 용서받기 어려운 반역의 상징이었다. 반면 생명나무는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배신 이후 그 길을 차단하셨다. 창세기 3장 24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3:24)

여기서 ‘그룹들’은 수호천사를 의미하고, ‘불 칼’은 접근을 차단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상징한다. 즉,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은 인간 스스로 선택하거나 다가갈 수 없는 길이 된 것이다.

이제 상상해보자. 우리의 눈앞에 지금, 선악과와 생명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면 당신은 어떤 열매를 택하겠는가?

선악과는 달콤하다. 먹으면 곧바로 하나님처럼 되는 것 같고, 자아가 확장되는 느낌을 준다. 반면 생명나무의 길은 불칼을 지나야 한다. 고난과 자기부인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악과는 영원한 파멸에 이르고, 생명나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다.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더 이상 과거의 창세기 3장 속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 바로 지금 우리의 심장 한가운데서 살아 숨 쉬며, 매 순간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우리는 날마다 선택하며 산다. 나의 기준으로 유익한 것을 취할 것인가, 하나님의 뜻과 기준에 따라 살아갈 것인가.

나의 기준은 언제나 달콤하고, 손쉽고, 유익해 보이고, 하나님의 기준은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손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길은 곧 생명의 길이며, 진정한 신앙의 길이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바로 그 생명나무로 가는 좁고 험한 길이다.


4. 죄의 자각 – 눈물이 열리는 자리

  • 성령의 역할: 죄를 깨닫게 하고, 눈물을 나게 하는 영

  • 회개는 감정이 아닌 본질적 방향 전환


성경이 말하는 ‘죄’는 단순히 비도덕적이거나 나쁜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화를 냈다’, ‘남에게 상처를 줬다’는 식의 도덕적 잘못은 죄의 열매일 뿐, 죄 그 자체는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행위 이전에 존재하는 상태이며,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인간의 본성적인 태도, 즉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가 주인이 되어 인생을 끌고 가려는 존재의 중심 방향을 의미한다.

죄는 행동이 아니라 존재의 기울기다. 죄는 실수가 아니라 단절이다. 그리고 이 죄는 모든 인간의 안에 뿌리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범죄’ 이전에 ‘분리’로서의 상태,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영적 단절의 상태로 말한다. 그리고 그 죄를 비로소 보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예수께서는 떠나시기 전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8)


성령은 단지 은사를 주고 감동을 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죄의 실체를 보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된다. 겉으로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든, 종교적으로 열심이었던 사람이든, 성령의 빛 앞에 서면 자신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었다는 사실, 겉으로는 예배하고 기도했지만 실은 자기를 위해 살아왔다는 진실이 드러난다. 그 깨달음은 가벼운 반성이 아니다. 그것은 가슴을 치게 하는 절규요, 깊은 회한의 눈물이다. 성령의 조명 아래 죄를 본 사람은, 더 이상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 없이 살았는지, 얼마나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자기 왕국을 짓고 있었는지를 처음으로 진실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눈물이 터진다.
그 눈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무너지는 자의 눈물이다. 그 눈물은 단절이 회복되는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고백이며, 그 눈물은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덮고 있던 조개 껍데기 같은 장막이 찢어지는 소리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사람의 설득이나 율법의 강요가 아니다. 진짜 죄의 자각은 성령의 은혜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 은혜는 인간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고, 부드럽게 찌르며 깊이 흔들어 깨운다. 그 깨우침은 부서지는 동시에 소생하는 은혜다. 죄를 직면하게 하시는 성령의 일은, 인간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성령이 오시면, 죄가 드러나고, 죄가 드러나면, 눈물이 흐르고, 눈물이 흐르면, 길이 열린다. 그 길은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다. 우리가 처음 지음 받았던 그 낙원 말이다.


5. 예수의 눈물 – 죄로부터 자유를 주러 오신 이


예수는 죄인을 정죄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분은 죄를 알면서도 품으셨고, 죄인을 보시면서도 울기부터 하셨다. 예수의 눈은 죄를 꿰뚫되 심판의 불꽃이 아니었고, 그분의 마음은 죄를 아파하되 멸망의 분노가 아니었다. 예수의 시선은 언제나 죄를 향해 열려 있었고, 죄인을 향해 다가가는 시선이었다. 복음서 곳곳에서 우리는 그 눈물의 장면을 만난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흘리신 예수의 눈물이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 앞, 그 속에 누운 것은 단지 한 친구가 아니라, 죄의 결과로 무너진 인간의 운명 전체였다. 그리고 예수는 그 무덤 앞에서 아무 말씀 없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35)


이 짧은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로 인해 당하는 죽음의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언이다.
하나님은 멀리서 지켜보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가 만든 상처와 고통, 죽음의 그림자 속으로 직접 들어오신 분이다. 그리고 그 절망의 자리에서 함께 우셨다. 예수는 죄인을 사랑하셨다. 그러나 그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분은 죄인을 보며 안타까워하시고, 가까이 갔으며,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예수께서 성전에 드나드는 세리와 창기, 간음하다 잡힌 여인,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 지붕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보여주신 태도는 모두 동일하다. 그분은 죄인을 먼저 품으셨고, 그 품 안에서 죄의 실상을 드러내셨으며, 그 드러남 속에서 새로운 삶으로 이끄셨다. 예수의 눈물은 단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죄인을 정죄했지만, 예수는 그 죄인의 마음 속 두려움과 수치, 외로움과 갈망을 보셨다. 사람은 겉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실 때, 그 도성의 종교, 성전, 율법, 제사가 가득한 도시를 보며 또 한 번 우셨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눅 19:42)


그곳은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자처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을 향해 울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말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 전하는 진리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물은 오늘 우리에게도 향한다. 우리가 신앙의 언어를 말하면서도,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할 때, 우리가 거룩을 외치면서도, 그 거룩 속에 사랑이 빠질 때, 예수는 여전히 우리를 향해 조용히 우신다. 예수의 눈물은 죄를 덮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눈물은 죄를 바로 보게 하시고, 그 죄 너머에 있는 잃어버린 자의 고통,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의 상처,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버린 인생의 슬픔에 대한 반응이었다. 예수의 눈물은 심판 이전의 사랑, 진리 이전의 연민, 회개 이전의 기다림이다. 그리고 이 눈물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한다. 예수께서 우신 이유는, 단지 사람들이 삶에서 나쁜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분이 우신 진짜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자기 길을 선택한 죄, 즉 존재의 단절, 창조주를 밀어내고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려는 본질적인 죄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이며, 그 상태에서 비롯되는 모든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향성이다. 예수는 그 죄를 보시고 우셨다.
그분의 눈물은, 우리 안의 이 단절과 무지를 깨우려는 하나님의 깊은 애통의 표현이었다. 우리는 지금 그 눈물 앞에 서 있다. 우리도 누군가의 죄를 보며 분노하고, 정죄하고, 차갑게 평가하기 전에, 먼저 예수처럼 울 수 있는가? 그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만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만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에 동참할 수 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www.sajins.net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