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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를 강제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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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천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5-08-1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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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율법인가 은혜인가

신정시대의 조세제도를 만인 제사장 시대에 강제하는 모순

오늘날 개신교 제도 가운데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관습 중 하나가 바로 ‘십일조’다. 성경 안에 십일조라는 용어는 분명 존재하지만,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까지 이를 신앙의 의무로 강제하고 있는 현실은 심각한 오해이자,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는 제도적 오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 십일조는 신정 국가의 조세제도였다

구약의 십일조는 단순한 헌금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던 이스라엘 신정 체제에서 시행된 ‘조세’였다. 기업이 없는 레위 지파를 위해 나머지 지파들은 수확의 십분의 일을 내었고(민 18:21–24), 3년마다는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를 따로 바쳤다(신 14:28–29). 게다가 절기마다 제물과 각종 예물을 드려야 했으므로, 실제로는 단일한 십일조가 아닌 3종류의 십일조 제도가 있었다. 이는 자발적인 헌금이라기보다 국가와 성전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정기적 부담금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레위 지파의 제사 제도도, 성전도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제사를 완성하셨기에, 십일조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폐기된 것이다.

2. 신약은 십일조를 명령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성도에게 십일조를 명령한 구절은 없다. 오히려 바울은 연보에 대해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 (고후 9:7)고 하며 자발성과 기쁨을 강조한다. 이는 신약의 헌금이 율법이 아니라 은혜에서 비롯된 헌신임을 분명히 한다. 예수께서도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십일조를 질책하셨을 뿐(마 23:23), 제자들에게 본받으라 명하신 적이 없다. 신약의 정신은 결코 율법의 반복이 아니라 자유와 사랑의 실천이다.

3. 가톨릭도 강제하지 않는 십일조를 개신교는 왜?

중세 가톨릭은 교회세와 토지세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세금을 거두었지만, 오늘날의 가톨릭은 십일조를 강제하지 않는다. 자유 헌금을 원칙으로 하며, 필요에 따라 자율적인 헌신을 요청할 뿐이다. 그러나 개신교 일부 교회는 십일조를 ‘믿음의 척도’로 삼고, 그것을 드리지 않는 자에게 직분 제한, 심지어 저주의 경고까지 내세우는 극단적 행태를 보인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로 성도를 정죄하거나 두려움에 묶는 일은, 명백히 복음의 정신에 어긋나는 율법주의적 억압이다.

4. 예수께서 칭찬하신 헌금은 10%가 아닌 ‘전부’였다

마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렙돈,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드린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가장 귀히 여기셨다. 부자들은 많은 돈을 넣었지만, 그 풍족한 중에서 남은 것을 넣었을 뿐이었다. 예수께서 주목하신 것은 액수가 아니라 그 여인의 전적인 헌신이었다. 십일조, 곧 10%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신앙의 본질을 외면한 값싼 형식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5.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십분의 일이 아니라 ‘전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일조를 따지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소유를 팔아 공동체와 나누고, 필요에 따라 형제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았다(행 2:44–45). 이들의 헌신은 비율로 환산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십일조라는 숫자적 기준을 신앙의 성숙도처럼 적용하여, 헌신을 ‘10%’로 규정지은 채 복음을 상업화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은혜의 삶을 다시 율법 아래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결론: 십일조는 복음의 길이 아니다

구약 시대의 십일조는 제사장 중심의 국가 운영을 위한 정당한 제도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우리는 만인 제사장 시대, 곧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 자유와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십일조라는 법적 장치가 아니라, 더 깊은 사랑과 자발적 나눔의 영으로 반응해야 한다. 헌금은 믿음의 강요가 아닌 감사의 열매여야 하며, 복음을 매개로 한 공포나 협박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교회의 운영을 위한 재정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연보의 정신, 곧 자발성과 기쁨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사람을 통제하고 부담을 씌우는 일은, 더 이상 복음이라 부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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